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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와인을 마시듯 < 삶과 마음 < 칼럼 < 기사본문 – 정신의학신문

정신의학신문 | 김재성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속에 잠들어 있던 검은 과실이 달콤하게 녹아 나오기 시작하며, 바닐라와 카시스의 향미가 감도는”
 
와인을 소재로 한 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표현의 일부입니다. 만화책에서뿐 아니라 와인에 관한 글들은 향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곤 하죠. 와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저도 꿀의 향, 아몬드 향, 가죽 냄새 등의 표현을 읽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자세한 묘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찾아보니, 이렇게 맛과 향을 자세하게 나눔으로써 와인을 조금 더 깊게 느끼고 다른 사람과 경험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렇습니다. 저는 와인을 마실 때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느껴도 그것이 어떤 향과 맛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르다'고 느끼는 데 그치고 맙니다. '지난번 것보다 조금 더 단맛이 있네.' 정도가 제가 그려낼 수 있는 전부이고요. 자연히 저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와인 설명서를 읽고 원하는 맛을 찾는 데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수십 가지 종류의 향을 구분해서 병에 넣어 둔 아로마 키트라는 재미있는 물건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 향을 구분해서 맡으며 훈련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내가 마시는 술의 복잡하고 미묘한 향을 구분해 냅니다. 이렇게 조금 더 예민해진 감각을 통해 와인을 보다 선명하고 깊게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와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와인의 향에 대한 이야기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감정에 대해 말하는 내용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와인의 향이 그렇듯 매우 복잡하고 미묘합니다. 화가 난 것과 짜증이 난 것은 다릅니다. 서운한 것과 슬픈 것도 다르고요. 즐거움과 슬픔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서운하지만 고마울 때도 있지요.
 
 
각각의 미묘하게 다른 감정에 따라 우리의 행동도 달라집니다. 실망했을 때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싸울 수도 있어야 하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공감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나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도, 상대의 느낌을 이해하는 데도 감정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감정을 자세하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특히 부정적인 감정과 관련해서 더 자주 나타납니다. 화남, 짜증스러움, 실망스러움을 구분하지 못하면 뭉뚱그려진 '부정적 감정'을 느낄 때마다 분노를 터뜨리는 것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공감하기 어려워 깊이 있는 인간 관계를 만들지 못합니다. '쟤는 무슨 일만 생기면 일단 화부터 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이 떠나가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많은 수의 어린아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이고, 성인의 경우에도 이런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감정 카드를 아로마 키트처럼 활용합니다. 카드에 있는 표정을 보고 각각의 사람이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등을 예상하고, 말하며, 생각을 나눕니다. 이렇게 감정에 대한 감각을 훈련한다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다 깊게 이어 나갈 수 있게 되겠지요. 감정을 와인 마시듯 향유할 때 삶은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서울으뜸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재성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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