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다파일

최광수의 통영이야기 – 386 '문화도시' 얻다 써먹을까? – 한산신문

구례 화엄사 매화 한 그루가 이번 봄 28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매화도 절도 동네도 몸살이 낫겠다. 절간 같아야 할 절간이 북새통이 되었으니 썩 좋은 일은 아니리라. 그렇지만 문화도시, 관광도시를 표방하는 통영의 시민으로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통영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도시 중 하나다. 국가 지정이나 공모사업의 선정 여부와 상관없이 다들 그렇게 믿고 있다. 통영 사람보다 외부 사람의 목소리가 더 높다. 아직 지정받지 못했다고 하면, 다들 "왜?"를 선물한다.
그만큼 시민들의 관심이 크다. 그런데 시험은 합격이 아니라, 합격의 관문을 통과한 다음이 정작 중요하다. 대학입시에 목을 맨 한국의 대학 교육이 그렇듯, 낙제점을 받지 않으려면 차근차근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아이들에게 얘기하면, "문화도시, 그게 뭐야?" "문화도시, 그거 어디에 쓰는 거야?"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러니 핵심은 '쓰임새'다. 모든 물건은 쓰임새가 있어야 한다. 쓰임새가 없는 물건은 '쓸모없다'. 쓸모없는 물건은 생명이 다한 것이다.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고, 심지어 싫어한다. 한때 잘 나가던 물건도 쓰임새가 다하면 사망선고를 받는다.
'문화도시'는 처음부터 쓰임새가 분명해야 한다. 화려한 명칭이나, 지원금보다 훨씬 중요하다. '문화도시'로 인해 지역에 돈이 돌고, 향유할만한 전시, 공연이 늘어나고, 다른 지역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것으로 쓰임새를 삼을 것인가? 쓰임새는 쓰는 사람의 요구와 선택이 결정하는 것이니 정답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시민의 합의로 쓰임새를 선택하면 된다.
그런데 그 너머의 쓰임새를 원하는 이들이 많다. 시민의 삶이 행복해지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돈도 좋고, 명예도 좋지만, 시민이 행복해지는데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거기 머시라꼬'가 된다. 통영은 오랫동안 '문화도시'로서의 명성도 누려봤고, 돈도 남부럽지 않게 써보았던 동네다. 그러니 '문화도시'로서 '돈'과 '명예'를 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 것이다.
시야를 넓혀서, 통영이라는 문화도시의 400년 역사 속에서 지역의 정체성과 쓰임새를 살펴보자. 통영 역사를 4개의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임진왜란부터 17세기까지를 제1기로, 영·정조 시대부터 구한말까지를 제2기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6, 70년대까지를 제3기로, 그 이후를 제4기로 나눠보자.
첫 번째 시기, 통영은 군사도시로서의 위상과 역할이 명백했다. 왜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었기에, 궁궐에 버금가는 세병관이 자리 잡았고, 통제사의 권한은 막강했다. 통영이라는 도시 자체의 쓰임새는 국방의 간성이었다.
지금 '문화도시' 사업에서 핵심으로 잡은 12 공방의 근원이 된 통영 공예의 근본은 군사기술이었다. 전선을 건조하고,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고, 각종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그 품질이 나라의 안위를 좌우했기에 국가에서 엄청나게 공을 들였다. 이건 K-국방을 이야기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IT를 비롯한 첨단 기술들도 군수산업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 제1기 통영의 쓰임새는 '국방'에 있었고, 통영 공예의 쓰임새는 '군사기술'이었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가 '국방'과 '군사기술'에 달려있었기에, 권력이 부여되었고,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었다. 그 덕에 돈이 돌았다. 재능 있는 사람과 기술과 돈은 신흥 도시의 핵심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헤게모니를 거머쥔 글로벌 중심도시는 모두 이 세 가지를 갖췄기에 가능했다.
통영도 그랬다. 사람과 기술과 돈이 몰려드는 '최고'의 도시가 되었고, 통영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저자 주. 이야기는 다음 호로 이어집니다.

source

Keep Reading

이전다음

댓글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