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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운 체크]노스페이스, '건국전쟁' 관람 직원 5만원···일제강점기 미곡상 손자 성기학 회장 – 이로운넷

문화/생활/리뷰
이로운넷 = 이화종 기자
국내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를 수입하는 영원무역의 지주사 영원무역 홀딩스가 이승만 전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선전물 '건국전쟁'을 관람한 직원들에게 현금 5만원을 지급하는 것이 오마이뉴스의 11일 단독 보도로 알려졌다.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영원무역홀딩스는 2월께 '건국전쟁 영화관람 지원' 사내 공지를 통해 영화를 본 뒤 영화관람권과 영수증을 첨부하면, 식사비 1만 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며칠 뒤 재공지에서는 "영화관람권 1매당 5만 원 지원해드린다"며 "영화관람권만 제출해주시면 된다"고 영화관람 지원을 대폭 늘렸다.
지원금은 3월 11일과 4월 9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원무역홀딩스 관계사 직원 A씨는 매체에 "(일부 경영진이) 직원들과 <건국전쟁>을 본 뒤 지원금도 늘렸다고 들었다"며 "(직원들 입장에선) 영화를 보는 게 이득이니 기회가 된다면 안 볼 이유는 없다"고 전했다.
영원무역 홀딩스 관계자는 “해당 영화 관람을 지원한 것은 일상적인 사내 이벤트 중 하나이며, 관람 여부는 임직원들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라며 "또한 이전에도 임직원들의 문화생활 독려 차원에서, 화제성이 있는 연극, 뮤지컬, 스포츠 등의 관람을 지원하는 이벤트를 진행해온 바 있다"고 밝혔다.
건국전쟁은 11일 오전 누적 관객 수 114만명을 넘어서 3월 박스오피스 5위를 기록했다.
◆ 47년생 영원무역 홀딩스 성기학 회장···'3·15마산항쟁' '제주 4·3사태' 인지할 나이
영원무역홀딩스가 왜 하필 ‘건국전쟁’ 관람 직원에게 5만원씩 줘가며 괌람을 권했는지는 의문이다. 
이 당시에 흥행작인 '파묘'도 한창 상영 중이었고, 세계적인 기대작 '듄:파트2'도 있었으며 레게음악의 전설인 밥 말리의 삶을 다룬 뮤지컬 영화 '밥 말리:원 러브' 와 동심을 자극하는 '찰리의 초콜릿 공장' 의 스핀오프작인 '웡카'도 있었다.
영원무역 홀딩스 관계자가 말한 '화제성'을 가진 작품이 참 많은 시기였고 '건국전쟁'의 화제성은 이승만의 양민학살을 외면하고 전쟁당시 서울 탈출기나 부정선거 관련 내용을 왜곡하려는 의도가 강한 선전물이라는 지적이었다.
특히 영원무역을 창립자인 성기학 회장은 1947년 생으로 당시 역사적 사건인 4.19혁명이란 시대 상황을 잘 알고 있을 나이라는 점도 의문에 의문을 품게 되는 대목이다.
성회장은 경남 창녕이 고향이며 1974년 젊은 나이에 영원무역을 설립하고 사업을 이끌어 현재의 영원무역을 일궈낸 인물이다.
그는 슬하에 성시은·성래은·성가은 3명의 딸을 두고 있으며 딸들도 영원무역과 영원홀딩스(영원무역의 지주사), YMSA(영원홀딩스의 대주주)에 몸담고 있다.
성가은씨는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외삼촌인 손경식씨의 장남 주홍씨와 2006년에 결혼해 CJ가와도 사돈관계가 됐다.
영원무역은 노스페이스 외에도 나이키의 제품도 수입판매 중이다. 그런데 노스페이스나 나이키가 양민학살자를 미화하는 선전물에 돈을 쓰는 기업과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을지는 의문이다.
◆ 일제의 對조선 쌀 수탈이 한창이던 1920년···미곡수출 사업으로 큰 돈 번 조부
성기학 회장은 자수성가라기 보다는 금수저에 가까운 인물이다.
성기학 회장의 조부께서는 1920년대에 마산에서 미곡수출사업을 했으며 부친은 경상남도 창녕일대에서 대규모 양파종자사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협성농산을 설립했다.
협성농산은 후일 성기학 회장의 형인 성기상씨와 동생 성기준씨가 물려 받아 현재 푸드웰이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은 일제가 매우 폭력적인 무단통치를 했던시기이며 당시 마산부는 마산경찰서와 헌병분대가 설립돼 무단통치의 핵심 억압기구의 역할을 하던 시기다.
또한 1918년 일본에서 발생한 대규모 쌀폭동과 1920년의 대불황을 겪은 일본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조선에서 1차 산미증식계획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산미증식계획이란 조선의 쌀을 수출이란 이름으로 모질게 수탈하는 일제의 만행이다.
 
우리역사넷은 富田晶子 外, 「植民地期朝鮮社會經濟の統計的硏究(1)」, 『東京大學會誌』 136號, 1984 기록을 인용해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1912년 1인당 1년 쌀 소비량이 약 0.77석이었던 데 비해 제1기 산미 증식 계획이 진행 중이던 1924년에는 0.6석으로 그리고 다시 제2기 산미 증식 계획이 진행 중이던 1932년에는 0.41석으로 떨어졌다.
이 통계는 산미증식계획으로 쌀의 생산량이 늘었지만 생산량 증가보다 훨씬 많은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고 있던 상황을 보여준다. 당시 조선인들은 쌀은 일본으로 보내고 만주산 잡곡을 수입해 먹어야 했다.
광복을 기점으로 특이한 일도 있는데 바로 '역창씨개명'이다. 당시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인 중 결혼·재산 등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조선에 귀화한 일이다.
이들 중 재산문제로 귀화하는 것은 미군정과 소련군정 모두 용납하지 않았다. 적발되는 경우 재산을 몰수 당하고 일본으로 강제송환됐다.
<본지>는 노스페이스와 영원무역에 취재를 시도했으나 성기학 회장의 부친과 조부의 이름을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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